대표변호사 호인 「소운」을 따서 만든 서재의 이름입니다.

16. 문명 – 고운기
귀족들 마차가 거리를 가득 메우자
파리와 런던의 시가지들은 온통 말똥이 점령했었다지
마차에서 쏟아지는 말똥이 공해가 되어
가솔린 쓰는 자동차를 만들었다지
말똥보다 가득하고
말똥보다 무서운
배기가스 매연이 나타날 줄 몰랐었겠지
그리운 말똥
먼 훗날에도 시인은 여전하겠지
그리운 매연
이라고 쓰겠지.
서변생각
인간의 진보가 꼭 발전일까? 말똥을 피하려다 매연을 얻은 문명. 결국 더 많은 오염을 낳은 이율배반적인 진보 앞에서, ‘그리운 말똥’이라는 역설은 무겁게 울린다. 미래의 시인은 아마 지금 우리의 선택을 회고하며 또 다른 ‘그리움’을 읊을 것이다.
17. 장미의 날 – 양애경
장미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가지 위에
솜털 같은 가시들을 세우고
기껏 장갑 위 손목을 긁거나
양말에 보푸라기를 일으키거나 하면서
난 내 자신쯤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어요
라고 도도하게 말하는
장미의 기분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가위에 잘려 무더기로 쓰러지는 장미꽃들과 함께
축축한 바닥에 넘어졌다.
서변생각
세상 앞에서 가시를 세우며 하루를 버텼지만, 밤이 되니 장미처럼 스러져 있었다. 도도한 척했지만, 결국 상처 입고 지친 나를 껴안는 이 시가 아프게 다가온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장미처럼 스스로를 지키며 버티다 무너진다.
18. 천사와 나눈 대화 – 윌리엄 블레이크
나의 탄생을 주관한
천사가 말했다.
기쁨과 웃음으로 만들어진
작은 존재여
가서 사랑하라.
지상에 있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서변생각
우리는 사랑하고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그것은 천사가 우리를 세상에 보낸 유일한 이유이다. 그래서 기뻐하고 웃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다.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본질이다.
19.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로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어리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
서변생각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고,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눈이 많이 온 겨울 골목길에 새벽에 누군가 다 타버린 연탄을 으깨서 뿌려 놓으면 행인은 그 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사랑은 자신을 태우는 일이다.
20.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백창우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 거야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 거야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 울릴 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 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 걸
서변생각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한 날 공중본건의로 근무하는 친구가 있는 먼 섬으로 갔다. 밤 12시에 보건소 전화로 합격자 발표를 들었는데 낙방했다. 육지로 가는 길이 없어져 버린 듯했다. 육지로 나오는 통통배의 갑판 위에서 다시 길을 찾았다. 길이 끝난 바다 위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었다.